난파

<작가 김우진>

 

김우진(1897-1926)은 1897년 장성 군수였던 김성규와 순천 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호를 처음에는 초여, 일본 유학 중에는 초성, 귀국 후에는 수산을 사용했다. 수산은 목포에서 연유한 것이고 초성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태양을 가리키는 '불타는 별'의 의미로 지은 것이다.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북초등학교) 졸업에 이어 일본 구마모또농업학교를 거쳐 19세에 곡성출신 정점효와 결혼, 1924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작품세계>

김우진은 한국 연극사에서 최초로 서구 근대극을 연구하고 영향을 받은 작가로 본격적인 근대극을 썼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대학시절 연극에 심취하여 "소위 근대극을 대하야"를 <학지광>에 발표하면서 시작된 평론활동과 극예술협회 결성, 국내 순회공연 등은 신파극 위주였던 조선의 연극계에 신극운동의 파문을 일으켰다. 이런 부분에서 그는 한국 연극의 개척자로서 문학적 위상을 갖는다.

"아아 무엇을 얻어야 하나"를 비롯한 여러 시는 표현적이고 낭만적인 자신만의 작법을 가지고 있었고 "자유의지의 문제", "생명력의 고갈" 같은 수상록에서는 서구 철학에 바탕을 둔 진보적 사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독일 철학에 심취해 니체의 '초인사상'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다.

'초인사상'은 아일랜드의 조지 버나드 쇼에게 이식되어 구체화 되었고 그것이 김우진의 희곡 작품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쇼의 희곡 "인간과 초인(Man and Super)"을 김우진은 같은 제목으로 대학졸업논문을 써서 철저히 분석해냈다. 자신의 희곡 "난파"에서는 쇼의 극작기법을 차용하여 실험적인 작품을 썼다. "산돼지"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여러 문학적 표현기법을 조화시키는 실험을 단행하였다.
김우진은 해박한 식견과 서구적 비평안을 가지고 당대 한국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이며 최초 신극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로 평가된다.

<현해탄 파도에 잠긴 별>

김우진이 추구한 자유로운 삶과 문학적 포부로 인해 부친과 갈등을 겪었다.
당대 지식인으로서 마음대로 조국을 위해 활동할 수 없었던 일제식민지의 환경도 그를 절망시킨 원인 중 하나였다. 결국 1926년 가족과 재산을 포기하고 집을 나왔다.
도쿄로 건너가 축지 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친구 홍해성의 집에 기거했다.
한편 윤심덕은 오사카에 머무르면서 대표곡 "사의찬미"를 비롯한 20여곡을 취입하고 있었다. 도쿄에 머물던 김우진에게 어느 날 그녀로부터 자살하겠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그는 홍해성에게 '그녀를 말리러 가겠다' 알리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경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을 향하던 관부연락선 덕수환 1등칸 3호실에 유서를 남기고 두 사람은 현해탄 바다로 투신하였다.

(출처 : 목포문학관 http://www.mpmunhak.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