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

<인사말>

 

김우진의 [난파]여, 부활하라!

김우진은 1920년대 초중반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문사입니다. 그의 나이 30세에 당대의 유명한 성악가 윤심덕과 동반자살하여 세간에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 동반자살의 비극적 낭만성이 오늘날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계의 연구는 30년이라는 짧은 생애이지만 일제 식민지 시대의 현실을 치열하게 살다간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영녀], [난파], [산돼지]로 이어지는 그의 대표작들에는 일제 식민지의 동통과도 같은 현실의 고통과 무게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그가 3막으로 된 표현주의 희곡(Ein Expressionistisches Spiel in drei Acten)이라고 독일어로 부제를 표기한 김우진의 [난파]는 표현주의 양식을 실험했다는 점에서 자못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독특한 실험성은 비단 김우진 작품들에만 국한되어 의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 한국 희곡사에서도 각별합니다.

김우진이 독일의 표현주의를 수용했다는 단서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그가 산문 [구미현대극작가(소개)]와 [창작을 권합네다] 등에서 독일 표현주의를 극찬한 점입니다. 둘째 그가 미국의 극작가 유진오닐의 표현주의적인 희곡 [황제 죤스]와 [털복숭이]를 소개하면서 비판적 성격의 촌평을 덧붙이고 있는 점입니다. 셋째, 카렐 차펙의 표현주의극인 [인조인간](原題 [R.U.R.])을 일본 축지소극장에서 직접 보고 연극평을 썼다는 점입니다.

이 글들에서 김우진이 독일의 표현주의 운동을 단지 실험성이 강한 예술로만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독일 표현주의 운동을 독일의 정신사적 관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독일이 제반 시련을 극복하려는 생명력 정신의 운동이며 예술형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독일 표현주의 연극을 자아 드라마(Ich drama), 절규 드라마(Schrei drama)로 보고 있으며, 이 관점에서 유진 오닐이 쓴 두 편의 표현주의 희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김우진이 강조하는 독일 표현주의 드라마에서 '자아'와 '절규'라는 것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가 세계와 화해하거나 세계에 귀속되지 않고 자아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세계와의 긴장과 갈등 관계 속에서 형성된 고통과 절규로 이해됩니다. 이렇게 보면 김우진이 이해한 자아드라마와 절규드라마라는 개념에는 자아와, 자아의 순수성 혹은 주체성을 훼손하거나 위협하는 세계라는 두 개의 대립개념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독일 표현주의에 바탕을 둔 비판 주체의 관점은 자신의 표현주의 희곡 [난파]에도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김우진의 [난파]는 현실도피를 바랬던 부정적 인물인 시인 자아가 점차 세계와의 대결에서 시련을 겪으며 현실로 회귀하여 긍정적인 자아로 변모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현실 인식이 전환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시인의 어머니입니다. 궁극적으로 시인이 카로노메의 허구성을 간파하고 현실과 직면하는 것은 분명히 시인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러한 판단에 이르는 데 근본적인 계기로 작용한 것은 어머니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인의 어머니는 이상주의와 결별하고 현실의 자각을 외친 김우진의 현실인식이 육화된 인물입니다. 이와는 달리 자아와 대립하는 두 부류, 즉 아버지와 신주, 비비와 카로노메는 각각 봉건적인 인습과 서구 개인주의의 허구성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이 상징성들은 당시 1920년대 전통과 서구의 과도기적 현실의 문제점을 의미합니다. 표현주의를 실험한 [난파]의 의의는 한국 근대 최초의 선구적 실험성이라는 측면과 아울러 바로 이 지점에서 부각됩니다. [난파]의 가장 큰 의의는 자신이 살았던 1920년대의 현실을, 엄존하던 거대한 전통과, 유입되는 새로운 서구의 윤리의식이 부딪혀 대립하는 갈등 공간으로 파악하였다는 점이고, 나아가 김우진이 가부장제의 봉건적 인습과 개인주의의 허구성, 그리고 현실도피적인 현실관 등을 논파하면서 고통의 여정을 통해 모순된 현실을 자각하고 수용하려는 현실주의 정신에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김우진의 [난파]에서 표현주의 극형식의 실험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사태의 한 측면만을 본 것입니다. 김우진의 [난파]는 분명 1920년대 일제 식민지 현실의 문제를 비판하는 정신적 긴장이 팽배한 실험 형식입니다.

이러한 실험성과 리얼리티는 바로 오늘의 우리가 우리의 현실과 만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1920년대의 김우진은 개인적 사정과 열악한 시대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희곡들을 창작하고도 공연 한번 올리지 못했습니다. 약 8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지금, 김우진의 작품이 공연된다면, 그것도 새로운 해석을 통해 우리 관객과 만난다면 그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최근 들어 극단 '그림연극'은 우리 연극계에서 독특한 연극미학을 펼치며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 극단이라면 신선하고도 의미있는 작업을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김우진의 [난파]여, 부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