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척어멈

전쟁은 억척어멈에게 빵을 주었을까

눈맛이 압권인 극단 그림연극 <억척어멈>

2006. 5. 5 오마이뉴스 박수호 (soohoya) 기자

"평화가 터졌다!"

극중 억척어멈이 하는 말이다. 흔히 터지다는 '대형 사고가 터지다'처럼 전쟁이나 사건 따위가 갑자기 벌어진다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 외에도 복 따위가 한꺼번에 생긴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면 억척어멈이 말한 평화는 사고인가, 행운인가?

그는 전쟁통에서도 포장마차를 이끌고 생필품을 팔며 살아간다.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에서도 버젓이 상행위를 하는 그에겐 어느새 '억척'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오히려 그는 이런 그의 별명이 전장을 누비며 영업할 수 있는 허가증 혹은 통행증으로 여길 정도다. 즉 그에게 전쟁은 연명의 수단을 제공할 뿐이다. 따라서 전쟁의 종결은 복이 터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업통고와도 같은 '대형 사고'로 인식된다.

연극 <억척어멈>의 연출을 맡은 이현찬(극단 그림연극 대표,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씨는 이를 두고 억척어멈 역시 희생자라고 말한다. "전쟁이 가져오는 피해는 참 슬프다"라고 운을 뗀 그는 "오늘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이라크인은 물론 참전한 미군 역시 피해자"인 것과 같이 극중 전쟁은 끊임없이 새로운 불행을 양산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전한다.

실제로 억척어멈은 각기 성이 다른 아이 셋을 데리고 살아가지만 전쟁통에 모두 잃고 만다. 그는 입버릇처럼 전쟁은 그에게 빵을 준다고 하지만 결국 전쟁은 그에게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사실만 안겨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혼자서 포장마차를 이끌고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지 말아야 하지만 또다시 기를 쓰고 오르려는 시지프스의 숙명이 오버랩된다.

극단 그림연극의 '억척어멈'은 극단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눈이 즐거운 연극이다. 3시간에 육박하는 원본의 본맛을 영상을 이용해 함축과 절제의 미로 되살렸다. 두 아들은 전쟁터에 보내고 전쟁의 포화 속에 언어장애자인 딸 '카트린', 동행한 군종목사와 더불어 유럽 전역을 떠도는 장면을 애니메이션으로 처리한 대목은 단연 압권.

가상의 세 인물이 나란히 유럽지도 위를 이리저리 걷는다. 이어 화살표와 동그라미, 세모가 사람이 됐다가 무기가 됐다가 하면서 화면을 가로지르고 외마디 비명소리가 새어나오면 어느덧 참혹한 오늘날의 전쟁 이미지가 눈에 그려진다. 3분여의 애니메이션은 원본에서 석 장에 이르는 분량이라고. 다만 직접적인 표현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애니메이션만으로는 군종목사와 억척어멈 사이에 잠시나마 싹튼 감정을 유추해내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이는 다음 장면에서 억척어멈과 군목, 그리고 요리사 사이에 묘한 3각관계가 형성되는데서 짐작할 수 있다 해도 말이다.

어린이극에서나 등장할 법한 인형도 이 극에서 는 중요한 구실. 예지력이 있다는 억척어멈은 작품 초반 아이들의 운명을 가늠할 수 있는 점을 보 는데 뽑는 점괘마다 '죽음'을 의미하는 검은 십자가가 나온다. 그는 이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면서 군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장면은 모두 인형극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이 대사는 원본에는 없다. 즉 인형은 가상의 현실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장치인 것. 카트린이 죽음을 맞이하는 작품의 말미에 이르면 예언은 곧 현실이 된다는 의미에서 카트린은 실제 배우가 연기하면서 비극성은 배가된다. 큰아들 아일립이 상사에게 호감을 사는 장면을 그림자를 이용해 원근감을 잘 살리며 극중극으로 선보인 대목 역시 인상적이었다.

다만 포장마차와 간의 의자 정도로 간소한 무대 장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배역 등 서사극의 창시자 브레히트 작품의 특징을 잘 살린 공

연이라지만, 비단 이 작품만의 문제가 아니라해도 '희망컨대, 충동질한다' 등의 번역투마저 '낯설다'는 측면으로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