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척어멈

삶의 실(實)과 허(虛)
- 동전의 양면성이 만나지는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

 

나는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의 마지막 장면, 텅빈 천막 수레를 이끌고 여전히 전쟁터를 누비며 홀로 살아가게될 억척 어멈의 남은 여생을 바라보며 한 여인이며 어머니인 쓸쓸하고 허전한 인간의 숙명이 그렇게 '허허'할 수 없다. 동시에 내게 떠오르는 장면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장면이다. 일생을 걸고 투쟁과 도전으로 큰 고기를 잡기에 목숨을 걸고 거친 바다 속에서 결국 승리를 이끌었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상어 떼에게 뜯어 먹히고 앙상한 뼈만 뱃전에 달고 돌아오는 노인의 마지막 모습이다.

작품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은 한 여인이며 어머니인 주인공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두 아들과 벙어리가 된 딸 까트린, 이렇게 세 남매를 살리기 위해 전쟁터를 생계유지의 터전으로 삼아 장사를 하며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나가는 한 여인의 삶의 편력이다. 소중한 자식 세 남매를 살리기 위해 전쟁터에서 겪는 주인공의 피나는 도전과 투쟁, 그녀의 지혜와 책략에도 불구하고 결국 억척 어멈은 두 아들을 차례로 전쟁터로 내몬다. 그리워하며, 안타까워하나 두 아들의 죽음에서 우리는 어처구니없이 인간이 처하게 되는 상황의 양면성에서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벌어지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이율배반성을 보며, 어이없이 무너지는 딸 까트린의 몰락 속에서도 말 못하는 벙어리 딸이 겪는 사랑과 배반의 이율배반성을 본다.

달의 이쪽에서 보았을 때는 밝음이었으나, 달의 그 반대편에는 어둠인 것이다. 인간이 목표로 삼은 그 높은 아성을 차지하기 위해 인간이 벌이는 도전과 책략, 지혜와 인내는 결국 허무 속에 함몰하며 삶이 얼마나 '허'한 것인가를 재미로움 속에 깊이 성찰하게 하는 연극이다.

내가 이 작품을 번역한 때는 군사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83년이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의 연극계는 서양 연극의 영향권 아래에서 연극의 본질이 무엇이고 연극의 올바른 형태(정형:正形)는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가운데 당시 움트기 시작한 각 국가와 각 민족 문화의 정체성 찾기, 다시 말해 문화의 뿌리 찾기를 동시에 추구하던 시대이다.
연극인은 한편 세계연극의 현주소인 당시의 유럽과 서양 연극의 현황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목말라 찾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우리의 연극 전통은 무엇이며 우리 연극은 어떤 형식으로 꾸며져야 진정한 우리 시대의 우리 연극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던 때이다.
7년간의 독일 유학을 마치고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에서 1967년부터 교수로 있던 본인은 독일연극을 독일어나 번역극으로 매년 무대 위에 올리는 한편 연극평론가로 활동하며 한국연극의 가능성과 한계를 끊임없이 더듬어 공부하던 때이다.
내가 한국연극에 보탬이 되는 활동이라고 생각한 것은 독일 연극 중에서도 한국연극의 정체성을 찾아 세우기에 가장 가까운 작품을 번역 상연하게 하여 한국연극의 지평을 넓혀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연극은 그 무엇보다도 대본 작업에서 시작하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희곡이 그 시작이다. 단단한 희곡의 구성을 가지면서 우리 정서에 맞는 기법을 갖추고 있는 독일 희곡을 찾아 번역 상연하므로 해서 한국연극의 방향 찾기의 두 갈래길, 즉 세계연극의 현주소 알리기와 우리 무대 위에서 우리 연극 정체성 찾기라는 목표에 알맞은 극작의 세계를 소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① 서사극 형식과 ②재미있는 연극을 지향한 브레히트 후기의 희곡은 바로 우리 민족정서에 가장 부합하는 대본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에서도 그의 마지막 발전기에 속하는 네 편의 연극(코카서스 백묵원, 갈릴레오 갈릴레이, 사천의 선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은 명작 중의 명작으로 연극사에 영원히 남을 작품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그의 마지막 작품인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은 그가 일생동안 추구하던 이율배반적인, 삶의 양면을 그 어느 작품에서 보다 적중하게 그려낸 작품이라고 믿어 한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틈틈이 번역하였다. 당시 브레히트에 관해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이원양 교수가 함께 번역하기를 청해 왔고, 나는 연극계에 또 한 분의 인재를 소개해야겠다는 선배 정신을 발휘하여 흔쾌히 승낙했다. 양혜숙·이원양 공역으로 월간『한국연극』지에 브레히트 희곡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다. 하지만 이 대본은 그 후 이원양 박사논문 출판시 이원양 단독번역으로 출판되었던 관계로 실망과 오해를 뛰어넘기 어려운 대본이 되기도 했다. 섣불리 남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공역을 한다는 일은 가능하면 할일이 아니라는 좋은 경험을 하였다.

어찌되었던 1990년까지 이어오던 나의 서양 연극과 우리 연극의 다리 놓기 작업은 1992년 방글라데쉬 국제 연극제에 참석하고 그곳의 연극을 보며 나의 연극작업의 방향을 돌리기로 하였다.
200년이 넘어 300년이 가까운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으며 서양 연극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리라 예상, 추측했던 그곳의 현대연극에서 나는 한국의 현대연극에서 보는 '여전히 갓 쓰고 구두신은' 현대연극을 보았던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정서는 끝없이 그어지는 평행선이라 단정했다. 그리하여 나는 1991년 발족했던 한국공연예술 연구회를 통해 우리 전통에서 우리다움의 뿌리 찾기와 그 체계화의 작업을 나의 필생의 사업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1996년 한국공연예술원을 개원하고, 'KOPAC시어터'를 조직 구성하여 21세기에 맞는 '뉴장르' 창출에 목표를 두고 뜻을 같이 하는 후배들과 지속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비록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장면이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만나지는 '허·허함'이 있을지라도 그 목적을 이루는데 온 힘을 다할 것이다.

2005. 4. 13 구기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