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들

한국연극 2003 10월호 <<리뷰>>

상징주의적 이미지 구현의 시도와 한계
극단 그림연극 <장님들>

 

글/김춘희(연극평론가)

벨기에 출신의 극작가 메테를링크(Maeterlinck)의 <장님들>(LesAveugles.1890) 은 상징주의극의 대표작이다. 극적 상황은 다음과 같다. 어두운 밤 깊은 숲 속에서 12명의 장님들(본 공연에서는 4명으로 축소됨)이 그들을 그곳까지 인도해 온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신부는 그들 가운데에 죽어 있으나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오랜 세월 함께 했으나 서로 본 적이 없고, 그런 사실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무력함과 소외를 실감케 한다. '볼 수 없음'자체가 이 작품에서는 충분한 극적 동기가 된다. 그 '볼 수 없음'은 '말' 로서 대체되어 대화는 그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유일한 도구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물의 구분이나 사실확인(예를 들면, 낮과 밤의 구분)의 불가능은 모호함과 공포를 자아낸다. 구체적 공간 감각의 결여로 단지 무엇과 무엇 '사이' 라는 인식 ("우리 사이에 뭔가가", "우리 위에 뭔가가" "하늘과 우리 사이" 등) 만이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 여기엔 가혹한 운명에 맞서는 주인공이나, 인간과 인간의 갈등 관계가 문제시되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는 인물들 각각의 정신 상태를 보여주는 것으로써 어떤 분명한 답을 요구하지도 않고 요구할 필요도 없다.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어 마냥 기다리기만 했던 이미 그들 사이에 있었던 신부의 죽음은 매일 동일한 장소로 와서 오기만을 기다리는 베케트의 고도(Godot)와 참으로 흡사하다. 메테를링크에서는 그 기다림의 실체가 '죽음' 자체로 다가 온 것이다.

인간의 실존주의적 무력함을 극화 시키려는 메테를링크의 의도는 앞을 못 보는 장님들의 삶의 어느 특정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상황 설정 자체를 최대한 극화한다. 이들에게 운명이란 죽음 자체로 다가오는데, 바로 그 죽음의 상징성 자체를 무대 위에 표현해내어야만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를 연출가는 안게 된다. 연출가가 "무대에 작품을 형상화해야 하는 순간 그 모호함에 생각이 막힌다."라고 한 것도 바로 이 작품의 극화 방식의 어려움을 잘 보여 준다. 텍스트상 이 정극(drame statique 靜劇)의 효과는 대화의 반복 또는 비연속성에 의해 부각되며, 반복성과 비연속성은 극적 리듬감을 조성하는 주요 요소이다. 이런 극적 속성을 형상화하기 위한 청각적 대사의 이미지화는 영상적 애니메이션과 배우의 인형 연기에 의해 구현된다. 이 방식은 '배우연기와 인형, 마스크와 같은 사물을 연극의 표현 방법으로 하는 인형 연극 예술 단체'라고 하는 극단 그림연극의 취지와 잘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러한 취지의 적절성과는 달리 극적 상징의 구현의 적절성은 어떠한가에 대해 논해 보자. 배우는 한 손으로는 인형의 얼굴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인형의 손이 된다. 배우의 두 손은 여러 감정들과 동작들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이 때 배우의 얼굴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인형의 얼굴과 배우의 얼굴을 나란히 보여주면서 수적 확대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는 장치이다. 그런데 자발적 사물이 아닌, 정지된 형태의 사물인 인형 뒤의 얼굴인 배우의 얼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 인형의 얼굴과 손을 움직이는 배우들의 표정과 동작은 집중력을 파괴해 버린다. 그들 각자의 대사와, 인형을 제대로 조종하려는데 소요되는 긴장된 에너지의 표출이 교차되어 발생하는 시각적 청각적 혼효는 대사의 이미지성을 해치고 있다. 인형 연기자의 연기 성격이 - 감정 이입의 형태로든, 중립적 형태로든 -분명히 규정되지 않아 대사의 상징성에서 자연스럽게 환기되는 연상 작용은 단절되거나 방해 받는다. 국내 초연인 이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다소 문제가 있으나 내면적 상징주의극을 시도하면서 예술성을 추구하려 하는 극단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