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푼짜리오페라

『서푼짜리 오페라』의 결말부에 대하여

 

정동란(독문학박사, 계명대 강사)

베르톨트 브레히트 B. Brecht의 정치 미학적 실험시기 (1926-1932)에 쓰여진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는 존 게이 J. Gay (1685-1732)의 『거지 오페라 1728 Beggars Opera 1728』를 토대로 하여 쓰여진 작품이다.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E. Hauptmann과 공동 각색한 이 작품은 1928년 8월 31일 베를린 쉬프바우담 극장에서 초연 되었으며, 이 작품으로 브레히트는 일약 세계적인 극작가로 부상한다.

이 작품의 모든 인물은 제도의 산물이고 제도와 결탁하여 살아간다. 부르주아 사회의 희생자인 거지는 창녀가 그들의 육체를 팔 듯이 자신의 비참함을 파는 상품으로 전락한다. 런던의 범죄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맥키스와 피첨은 자본주의 원칙을 희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피첨과 맥키스는 범죄자로서의 부르주아이며 동시에 부르주아로서의 범죄자이다. 부르주아사회의 질서를 대변하는 경찰 브라운은 그 질서의 희생자들인 창녀와 거지들보다는 질서를 지배하는 사람들을 보호한다. 인간의 존재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로 파악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를 파악하면서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의 원칙을 통해 존재하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브레히트가 자신의 서사극이론의 새로운 기법들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가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결말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며 각 장면의 종속관계보다는 각 장면의 독자적 가치를 존중하고자 했던 그의 서사극 이론의 연극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실험은 결말부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각 장면이 인과관계로 연결된 선형적 구조를 가지는 고전적 극의 결말부에서는 작품의 전개에서 보여주는 세계관의 완결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에 반해 진행과정이 중시된 서사극에서는 이러한 완결된 가치관이나 세계상보다는 변화 가능한 과정으로서의 세계를 보여준다.

3막 9장에서 교수형을 기다리는 맥키스 앞에 피첨이 등장하여 관객에게 말을 건다:

존경하는 관객 여러분, 이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맥키스 씨는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 그러나 여러분, (...) 우리는 다른 결말을 생각했습니다."

피첨이 다르게 생각하는 결말은 맥키스를 사면하는 것으로 존 게이의 원작에서 따온 것이다. 맥키스는 말을 탄 사신의 출현으로 교수형을 모면하고 귀족 신분에 종신연금까지 받게된다. 이처럼 결말부에서 주인공이 구출되는 것은 시민문학적 결말로서 자본주의를 표상화하는 것이며 자본주의의 신화적 모습의 재건을 의미한다. 이 장면에서 브레히트는 신화가 사회를 보호하는 방식을 희극적으로 보여줌으로서 자본주의의 신화적 이데올로기를 낯설게 한다. 브레히트는 "시민문학에서 말 탄 사자가 등장하여 질서를 수립하는 것은 시민사회 현상유지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고 주장하며 맥키스를 구출함으로써 시민문학을 희화화한 것이다. 또한 범죄자를 용서한 작품의 결말은 주인공에 대한 감정적인 집착을 희화화한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맥키스는 몰락하는 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자로 설정되지만 부르주아처럼 보이지 않으며 유쾌하고 인습이나 도덕에 젖지 않고 자유를 구가한다. 관객은 이러한 모습 때문에 비도덕적 인물인 맥키스를 사랑하고 주인공의 구원에 동감한다.

이 작품의 해피엔딩은 희극적 결말이다. 규범과 실제 사이의 괴리에서 생긴 희극적 갈등은 규범이 승리함으로 해소된다. 브레히트는 부르주아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작품의 결말부에서 새로운 규범과 질서를 제기하지 않고 오히려 기존사회에 다시 동화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브레히트는 이러한 결말이 시민문학에 대한 조롱으로 읽혀질 것을 기대했다. 결말부에서 사용된 사신의 등장은 기계신을 의미하는 연극적 장치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기법이다. 이 연극적 장치는 극작가가 논리적인 결론을 어떻게 내려야 할 지 모르는 경우나 혹은 모든 갈등과 모순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찾는 경우에 흔히 사용되는 기법이다. 비사실적인 것을 사실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혹은 에필로그의 필요성 때문에 환상을 만들지 않고 작품을 끝맺는 수단인 이 기법은 신적 해결이나 정치적 해결의 유효성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경우에도 사용된다. 말 탄 사자가 등장하여 정치적 해결을 하는 이 작품의 결말은 분명 패러디 기법이다. 그러나 당시 관객은 패러디에 대한 그의 의도를?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은 시민적 환상만을 취하고 그 나머지는 무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브레히트는 부르주아 작품을 모방한 덕으로 이 연극이 성공했다는 점을 참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맥키스가 자신의 구원에 대해 "고통이 극에 달하면 구원도 멀지 않은 법"이라고 말하자 피첨 부인은 이렇게 항상 말 탄 사신이 나타난다면 우리 인생이 쉽고 평화로울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에 대해 피첨은 현실은 그렇지 않으며 "억압받는 사람들이 항거하여 일어났을 때 국왕의 사신이 오는 일은 거의 드물기 때문에 결코 열성적으로 불의에 맞서 싸우려 해서는 안된다" 고 충고한다. 모든 이들이 앞으로 나오면서 노래하는 합창에서:

"불의를 지나치게 박해하지 마시오, 곧 그런 일은

가만 내버려두면 저절로 얼어버릴 것입니다, 날씨가 추우니까.

비통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 세상의

어둠과 혹독한 추위를 기억하시오."

작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합창에서 브레히트의 이중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비정한 세상을 기억하기 위해 불의를 그냥 두라는 일관성 없는 태도는 작품해석을 모호하게 한다. 이점에 대해 브레히트는 이 작품에서 주제나 주제의 재현, 재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부르주아적 관점들을 문제삼고자 했다고 쓰고 있다. 브레히트는 이 작품에 대한 주석에서 이 작품은 "부르주아 관객들이 인생으로부터 보고 싶어하는 것에 관한 보고"라고 정의한다.

브레히트의 연극은 관객을 중시하는 연극이다. 관객의 연극적인 환상을 파괴하여 관객이 극장에 앉아 무대 위의 연극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수단을 도입하였다. 이를 위해 공연의 유희적 측면을 강조하고, 현실을 해석하기보다는 연극의 가능성과 한계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브레히트가 생각한 이상적인 관객은 공연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판단하며 끊임없이 이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관객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극태도로 관객이 처한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스스로 파악하기를 원했다. 관객의 정치적 활성화가 그의 연극의 목표였으며 이 작품에서도 그의 미학적 의도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에 달했던 시대에 대응하는 그의 정치적 의도와 직결된다. 이 작품은 결말보다는 사회적 희극성을 드러내는 과정에 비중을 두고 있다. 브레히트가 생각한 결말의 대안은 관객의 지평에서 실현되어야 할 과제로 암시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나 비인간적인 범죄자들이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고 특혜를 누리는 경우에 대해 우린 더 이상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브레히트는 서사적 기법을 통해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불의가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불의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고발하는 이 연극은 변함없이 비판적 의미와 시사적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