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푼짜리오페라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1956)>

브레히트는 1898년 2월 10일, 뮌헨에서 멀지 않은 아우그스부르크 Augsburg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제지공장의 공장장인 아버지로 인해 상당히 유복했다. 아버지는 브레히트가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길 바랬고, 브레히트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 위해 1918년 뮌헨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의학공부는 그의 천성에 맞지 않았고 그는 1년 만에 대학을 포기한다. 브레히트는 의과대학에 다니던 20대 초반부터 연극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바알』(1918),『소시민의 결혼』(1919), 『한 밤의 복소리』(1919), 『도시의 밀림 속에서』(1921) 등은 그의 중요한 초기작이다. 브레히트는 연극작업에 있어서 공동작업을 중시했으며 그가 그리는 세계는 변증법적 유희를 통해 세계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변화의 기반은 그에게 있어서 기존의 것에 대한 의심이라 할 수 있다.

브레히트는 예술의 효용가치를 주장하며 예술이 사회, 정치문제와 대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진지하게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였고, 1928년 베를린에서 자본주의 시민사회를 강도의 사회로 풍자한 음악극 『서푼짜리 오페라』(1927/28, 음악: 쿠르트 바일)를 공연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브레히트는 오락의 대상이었던 연극의 기능을 개조하고자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연극을 대하는 관객의 자세부터 바꾸고자 했다. 관객은 연극을 재미로 즐기기만 하는 단순한 예술 소비자 역할에서 벗어나 연극을 통해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연극의 생산자로 올라서야 했다. 관객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이를 통해 올바른 인식에 도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이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연극의 결말이 아니라 그 결말에 이르는 과정과 원인이다. 이를 위해 브레히트는 상황과 관찰자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이 같은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은 1933년부터 1948년에 이르는 그의 망명시기에 완성되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제국수상에 임명되면서 많은 독일 지식인들이 망명길에 올랐고 브레히트도 1933년 4월, 조국을 떠난다. 그는 1949년 베를린에 돌아올 때까지 17년간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그리고 미국을 떠돌았다. 그는 미국에서 밥벌이를 위해 할리우드가 요구하는 식으로 영화대본까지 써야 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무엇보다 읽어 줄 독자가 없는 작품을 써야 한다는 괴로움을 극복해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브레히트에게 있어서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작품을 구상하고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시기였다. 그의 대표적인 서사극 『사천의 선인』(1939/1941),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1939), 『푼틸라 씨와 그의 하인 마티』(1940), 『코카서스의 백묵원』(1944) 등이 이 시기에 쓰여진다. 브레히트는 새로운 세계의 희망을 동독에 걸고 1949년 동베를린으로 돌아온다. 그는 여기에서 동독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아내인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베를린 앙상블을 창단하였고 이 극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철저하게 실험할 수 있었다. 그는 모순이 풀리지 않는 사회를 표현하는데 역점을 두었으며, 그 부수적인 현상인 모순된 인물과 분열된 인간의 행위에 관심을 두었다. 1956년 8월, 브레히트는 베를린 앙상블에서 『갈릴레이의 생애』(1938) 연습 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그는 58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생을 살았으나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현실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인식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모순 가득한 현실을 이야기했으나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언제나 극복 가능한 것이었다.

 

<쿠르트 바일 Kurt Weill (1900-1950)>

브레히트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작곡가. 12세에 이미 작곡을 시작한 바일은 베를린 음대에 진학했으나 보수적 교육에 반발하여 학교를 그만두고, 한 때 극장 지휘자 일을 맡기도 했다.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 그는 부조니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인 작곡 수업을 받았고 25세 경에는 당시 음악계를 대표하는 선두주자가 되었다.

짧고 명랑하며 교육적인 텍스트를 선호했던 바일은 1927년 '바덴바덴 실내 음악제' 집행위원의 권유에 따라 브레히트와 첫 공동작업을 하게 된다. 복싱 링 형태의 무대에서 공연되었던 『마하고니 노래극』은 축제를 주도하던 젊은 음악가들에게 오페라와 음악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으며, 관객의 반응과 축제 조직 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브레히트와 바일은 2년 뒤 다시 『린드버그 비행』을 가지고 바덴바덴의 축제에 참가한다. 라디오라는 매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매체 비평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던 이 실험은 참가자들과 비평가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반응에 고무된 브레히트와 바일은 다시 1930년 축제에 『긍정자』를 가지고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브레히트와 아이슬러의 『조처』 심의를 둘러싼 조직위와의 불화로 축제의 틀 밖에서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바덴바덴의 축제와 관련된 일련의 작업 외에도 바일은 여러 편의 브레히트 텍스트에 곡을 붙였다. 그 중에서 『서푼짜리 오페라』(1928) 공연은 바이마르 시대 최대의 흥행작으로 기록되었다. 이듬해에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념하기 위해 브레히트의 시에 곡을 붙인 「베를린 진혼곡」이 완성되었고 1930년에는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가 무대에 올려졌다. 망명지에서 완성된 발레극 『소시민의 칠거지악』(1933)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막을 내린다. 음악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브레히트와의 입장차이와 망명이라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두 사람은 더 이상 함께 작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치스 정권의 등장 이후 바일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서 계속 음악가로 활동했으며, 이 시기에 만들어진 대표작으로는 뮤지컬 『어둠 속의 여인』과 『계곡 아래서』(1948) 같은 작품이 있다.
(『브레히트의 연극세계』, 한국브레히트학회 편, 열음사, 2001, p.529-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