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푼짜리오페라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 (1927/28)>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제까지 대한민국에서 불행하게 그리고 부당하게 항상 이데올로기라는 족쇄에 채워져 있었다. 분단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사건은 문화 전반에 언제나 그림자를 드리워왔는데,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가 브레히트의 경우일 것이다. 그의 이름은 문학의 다른 어떤 장르보다 먼저 드라마라는 장르를 통해 알려졌지만, 한국에서 브레히트는 사상성으로 인해 금지와 통제의 감옥에 갇혀 무대를 상실한 채 대학의 학문 틀 속에 숨어 지내야 했다.

1988년 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올림픽 덕택으로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무대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브레히트라는 이름의 유명세는 이미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과 함께 빛이 바라기 시작하며 '한 물 지나간 작가'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레히트의 작품들은 이후 한국의 전문 연극계와 대학가에서 꾸준히 공연되는 레퍼토리에 속하고 있다.

그러자 이번에는 브레히트 극의 무대 형상화 작업에 대한 논란이 뒤따르게 된다. 이러한 논쟁은 나아가 브레히트를 계승했다고 하는 극작가들, 예컨대 하이너 뮐러 등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아무튼 브레히트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질 경우, 소위 그의 '서사극' 이론에 연출자가 얼마나 의존하는가에 따라 때로는 브레히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거나 혹은 브레히트를 그냥 '답습했을 따름'이라는 비평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21세기에 들어선 브레히트 공연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소재와 주제라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때,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한국에서 브레히트는 아직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의 몇 가지 질문이 대신하리라 생각한다. 현실 사회주의의 쇠퇴를 단순히 자본주의의 승리로만 간주할 수 있으며, 브레히트가 지적하던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들은 (특히 한국에서) 모두 해소된 것일까?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확대된 자본의 막강한 위력은 여전히 아니 더욱 광범위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비록 연극이 사회를 개혁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사회체제와 구조에 대한 성찰과 비판은 잊지 말아야할 자세가 아닐까? 형식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더라도 브레히트는 아직 유효하다. 이른바 서사극 이론을 오늘날의 연극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하더라도 알게 모르게 현대 연극에 스며든 서사극적 요소는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브레히트의 연극의 덕목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배우면서 즐기고, 즐기면서 배우기를' 원한 브레히트의 연극은 어떤 다른 연극들보다 연극성이 뛰어나며 다양한 공연 방식과 실험을 허용한다.

이번 『서푼짜리 오페라』 공연의 의미는 학계와 연극계의 공동작업일 것이다. 이 공연을 위해 연출가는 지난 봄 「브레히트 춘계 학술심포지움」에 참가하여 학회 회원들과 장시간의 토론을 펼쳤다. 특히 그 날의 토론에서는 브레히트 드라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음악에 대해(드라마 속에서의 음악의 역할과 기능, 그리고 정확한 해석 등) 무엇보다 오랫동안 의견을 교환한 바 있다. 아무쪼록 이번 공연이 생산성을 수반할 브레히트 드라마의 창조적 수용의 한 이정표가 될 것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