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 날개

<작품을 만들며 떠오른 연상들...>

 

박제란 죽은 동물의 표피를 화학처리하고, 그 몸속에 물질을 채워넣어 오랫동안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도 상황에 따라선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여겨지거나, 생각될 때가 있다. 그게 박제다.

이상은 여러 번 자신의 작품을 즐기기는 커녕 딴지를 거는 독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구인회의 일원이자 이상과 가까웠던 김기림은 작품 "날개"의 첫 문장인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를 보는 순간 제우스신을 떠올렸다 한다. 그 만큼 작가 이상은 한국인으로서 거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작가 이상을 말하면, 으레 프라하의 카프카(F. Kafka)가 연상된다. 프라하성 옆 좁은길에 금세공업자들이 군집하였다는, 지금은 관광명소로 알려진 황금소로에 카프카가 살았던 곳이 있다. 올라가기 버거울 정도로 좁고 가파른 2층계단, 창이라고 하기에 의심될 정도의 작은 손바닥만한 창문. 창문을 열면 시야에 들어오는 가파른 벼랑이 섬뜩하다. 이 좁고 작은 집에서 카프카는 위대한 "변신"과 "성"을 지어 냈다. 그의 애환과 창작열에 눈이 뜨거워 지고, 목이 메인다. 실존주의 작가란 말이 절로 나왔다.

"날개"의 손바닥처럼 작은 빛이 들어오는 '나'의 방. 카프카의 창문이 바로 떠올랐다. 방을 걸어 잠근 체 침대 위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풍뎅이 '그레고르 잠자', 방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는 '나'. 두 작가의 작품세계가 흡사하다. 두 인물은 현대사회의 무엇이 힘들었을까. 두 작품의 원인은 돈에 있다. 금전이란 돈의 영향력은 과거나 현대나 마찬가지로 크다. 하지만 과거에는 오늘보다 조금 더 따뜻한 민심이 있지 않았을까.

이상은 "날개" 프롤로그부분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신과 위고의 빵 한 조각을 운운하며, 현대사회에서 빵을 더 중요시 한다고, 그러나 그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야 되겠냐고 한다.

이상은 그의 어느 수필에서 풍족히 먹고 쓰러져 자고 있는 사람을 시체로 비유했다. 작품 "날개"는 바로 이런 사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고를 하는 사람은 현대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박제 아닌가.

원작을 분석하면서 박제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정말 슬픈 일이다. 개가 짖지 못하면 벙어리라고 한다. 자기의 소리를 강하게 하지 않으면 존재의 가치가 없는 걸까. 이 사회는 누구의 것인가. 또 한 사람, 절뚝거리면서 자기 하고 싶은 데로 걸어가는 사람, 무세중선생님이 떠오른다.